오디세이는 수천 년 전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오디세우스가 전쟁이 끝난 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10년 동안 겪는 모험. 사이클롭스와 세이렌, 키르케와 칼립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수많은 유혹과 죽음의 위기를 지나 결국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왜 하필 지금 놀란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을까.
왜 그는 고대 그리스의 언어와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현대적인 대사와 감정으로 이야기를 다시 만들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는다.
왜 오디세이를 홍보하는 자리에서 놀란은 AI를 갑자기 '트로이 목마'에 비유했을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이번 놀람 감독의 오디세이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기술이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잃지 말아야 하는가를 묻는 영화처럼 읽히기 시작한다.
놀란은 실제로 AI를 '트로이 목마'라고 말했다
2026년 7월 프랑스 인터뷰어 휴고 트라베르(Hugo Travers)의 HugoDécrypte 인터뷰에서 놀란은 AI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질문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트로이 목마는 겉으로는 선물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전쟁의 목적을 가진 병사들이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AI도 우리가 일상에서 환영하는 기술이지만 나중에는 전혀 다른, 더 어두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놀란의 답은 의외로 직설적이었다.
“I think AI is a Trojan horse that everybody knows the Greeks are inside.”
그리고 이어서 AI를 “a transparent horse”, 즉 유리로 만들어진 투명한 말이라고 표현했다.
모두가 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란은 여기서 AI 자체를 무조건 악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술이 인간에게 많은 선물을 줄 수 있지만, 기술을 받아들일 때 회의적인 태도(skepticism)가 필요하고, 기술 자체뿐 아니라 그 기술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사람들의 동기(motives)*역시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AI가 만들어낸 콘텐츠를 빠르게 식별하고 'AI slop'이라고 부르며 거부하는 현상을 놀란은 오히려 건강한 회의주의라고 평가했다.
이 발언은 굉장히 중요하다.
놀란이 말하는 핵심은 단순히
"AI는 위험하다."가 아니다.
오히려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믿지 말라."에 가깝다.
기술의 기능뿐 아니라 그 기술이 나에게 무엇을 하게 만드는지, 누가 왜 그것을 제공하는지, 그리고 내가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계속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오디세이의 여러 시련이 새로운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트로이 목마는 AI 시대의 가장 강력한 은유가 된다
트로이 목마의 무서움은 말 자체에 있지 않다.
진짜 무서운 것은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성 안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강제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충분히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AI와 상당히 묘하게 겹쳐진다.
AI 역시 처음부터 "나는 인간의 능력을 빼앗으러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매력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시간을 절약해준다.
글을 써준다.
번역해준다.
요약해준다.
검색해준다.
아이디어를 준다.
코드를 만들어준다.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사람이 몇 시간 걸려서 해야 할 일을 몇 초 만에 처리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편리함을 얻는 대신 인간이 무엇을 하지 않게 되는가?
바로 이 질문이 오디세이를 AI 시대에 다시 읽게 만드는 출발점이 된다.
놀란은 오디세이를 과거의 언어로 재현하지 않았다
놀란은 LA Times 인터뷰에서 고대 이야기를 그대로 박물관에 보관하듯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화를 “fresh and modern way”로 만들고 싶었고, 호메로스 시대의 관객에게만 통했던 것이 아니라 현대 관객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의 대사도 고대의 장중한 문체가 아니라 현대인이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보다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다.
놀란에게 오디세이는 이미 완성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이 다시 읽어야 하는 이야기였던 셈이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어 다시 오디세이를 읽으니 이야기가 다르게 보였다고 말한다.
젊었을 때는 모험과 전쟁과 괴물의 이야기였다면, 중년의 시선으로 보니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랑과 상실, 가족과 귀환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의미심장하게 오디세이를 자신의 모든 영화와 연결한다.
가족 이야기이면서 사랑 이야기이고, 복수 이야기이며 전쟁 이야기이고, 성장 이야기라는 것이다. 놀란에게 오디세이는 자신의 영화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원형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질문 역시 단순히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기술과 전쟁과 욕망이 모든 것을 바꾸는 시대에 인간은 결국 무엇을 향해 돌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읽을 수 있다.
첫 번째 시련 : 트로이 목마
편리함 속에 들어오는 것
AI와 오디세이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은 당연히 트로이 목마다.
트로이 목마는 인간이 만든 지능과 전략의 극단을 보여주는 장치다.
오디세우스는 힘만으로 전쟁을 이긴 사람이 아니다.
그는 꾀와 전략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가 만들어낸 전략은 엄청난 파괴를 가져온다.
놀란은 실제로 트로이 목마를 영화의 핵심 이미지로 만들었다. LA Times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오래전부터 모래사장에 비스듬히 쓰러진 거대한 목마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고, 결국 오디세이에서 그것을 구현했다.
그리고 영화가 나온 뒤 그는 AI를 다시 트로이 목마에 연결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전이 발생한다.
고대의 트로이 목마는 인간의 지능이 만들어낸 도구였다.
그리고 오늘날의 AI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지능 도구 중 하나다.
하지만 도구가 강력해질수록 중요한 것은 도구의 능력이 아니라 도구와 인간의 관계가 된다.
AI가 나보다 글을 잘 쓰는가?
AI가 나보다 빠르게 정보를 찾는가?
AI가 나보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가?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하지 않게 되는가?"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시련 : 로터스 이터스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편안한 상태가 될 때
오디세에서 로터스 이터스, 즉 연꽃을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우 독특하다.
그들의 위험은 폭력적인 괴물이 아니라 망각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적을 잊게 만든다.
돌아갈 이유 자체를 잊는다.
이것을 AI 시대에 비유하면 굉장히 섬뜩해진다.
AI는 우리의 기억을 없애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기억해준다.
검색해준다.
정리해준다.
요약해준다.
다시 찾아준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기억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줄여버릴 수 있다.
예전에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료를 읽고, 비교하고, 틀리고, 다시 생각해야 했다.
지금은 질문을 입력하면 결과가 나온다.
이것은 엄청난 발전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질문을 만들 수 있다.
결과를 얻는 능력이 늘어난 만큼, 스스로 답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늘어났는가?
AI가 모든 것을 대신 기억해주는 시대에 인간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다른 형태의 로터스 이터가 될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검색하지 않아도 된다.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결정조차 AI에게 물어보면 된다.
너무 편안해서 다시 돌아갈 이유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세 번째 시련 : 사이클롭스
인간의 판단이 하나의 거대한 힘에 의해 압도될 때
폴리페모스는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다.
그와 정면으로 싸우면 인간이 이기기 어렵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힘이 아니라 이름과 언어와 전략을 이용한다.
놀란은 사이클롭스를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괴물을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고, 폴리페모스의 시각적 영감 중 하나로 고야의 「사투르누스」를 언급했다.
AI 시대에 사이클롭스는 거대한 기술 시스템으로 읽을 수도 있다.
개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알고리즘과 데이터와 플랫폼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결과를 사용하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사이클롭스를 이기는 방법은 더 강한 힘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AI 시대에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AI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AI가 제공하는 정보 가운데 무엇을 믿을 것인지 판단하는 능력일 수 있다.
네 번째 시련 : 세이렌
너무 매력적인 목소리
세이렌은 사람을 죽이는 힘으로 유혹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른다.
듣고 싶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그 소리를 향해 간다.
이것은 오늘날의 추천 알고리즘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AI와 플랫폼은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을 보여준다.
내가 클릭할 만한 것
내가 오래 볼 만한 것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
내가 이미 믿고 있는 생각
AI가 만들어내는 콘텐츠 역시 점점 더 인간의 취향에 맞게 정교해질 수 있다.
그러면 문제는 거짓말이 아니라 너무 듣기 좋은 진실이 될 수 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계속 들으면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를 이기는 방법은 노래를 없애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알고 대비했다.
귀를 막고, 자신을 배에 묶었다.
이 장면이 주는 교훈은 의외로 현대적이다.
유혹을 없애는 것보다 내가 유혹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다.
AI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AI에 휘둘리지 않아."라고 자신하는 것보다
"나 역시 편리함과 확신과 맞춤형 정보에 중독될 수 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더 오디세우스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시련 : 키르케
도구가 인간을 더 편하게 만들 때
키르케는 사람을 다른 존재로 변화시킨다.
그녀의 섬에서는 인간이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다.
이것을 AI 시대에 대입하면 조금 다른 질문이 생긴다.
AI가 인간을 더 똑똑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인간이 AI가 잘하는 방식에 맞춰 변화하는가.
처음에는 사람이 AI를 사용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인간의 업무 방식이 AI에 맞춰질 수도 있다.
문서를 AI가 읽기 쉽게 만든다.
질문을 AI가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사고를 AI가 처리하기 좋은 형태로 단순화한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사고 자체가 도구에 맞춰질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기술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 너무 성공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여섯 번째 시련 : 칼립소
너무 편안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칼립소는 특히 AI 시대와 연결해서 생각해볼 만하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섬에서 머무를 수 있다.
그곳에는 집과 다른 형태의 편안함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이타카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난 = 나쁜 것, 편안함 = 좋은 것"이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언제나 편안함을 원한다.
문제는 편안함이 목적을 대신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AI는 인간에게 엄청난 편안함을 제공한다.
글을 쓰기 힘들면 대신 써준다.
생각이 막히면 아이디어를 준다.
공부하기 싫으면 설명해준다.
결정을 못 하면 추천해준다.
일하기 싫으면 자동화해준다.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AI가 무엇을 추천하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칼립소의 섬은 아름답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그곳을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지는 이타카이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시련 :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완벽한 선택은 없다는 것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통과하는 장면은 인간의 의사결정에 관한 아주 오래된 은유로 볼 수 있다.
한쪽에는 괴물이 있고 다른 쪽에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있다.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다.
현대의 기술 선택도 비슷하다.
AI를 사용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
AI를 무조건 사용하면 인간의 능력과 일자리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AI를 받아들이면 효율이 올라간다.
하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면 판단력과 전문성이 약해질 수도 있다.
AI를 거부하면 인간적인 능력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생산성을 놓칠 수도 있다.
답은 AI를 써라 or 쓰지 마라가 아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기술을 이용하되 기술에 자신의 방향을 맡기지 않는 것 이것이 훨씬 어려운 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집'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등장한다.
Ithaca
이타카는 오디세우스가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놀란의 인터뷰를 보면 이타카는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home'이 물리적인 장소보다 친구와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간에 가까워진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영화 전체를 바라보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
오디세우스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 중 하나가 된다.
전쟁을 겪는다.
괴물을 만난다.
신을 만난다.
유혹을 만난다.
죽음과 가까워진다.
온갖 지식과 경험을 얻는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가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다.
더 많은 힘도 아니다.
더 많은 모험도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진짜 승리는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을 AI 시대에 적용하면 상당히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AI는 인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더 빠르게 검색할 수 있다.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비교할 수 있다.
더 많은 문장을 생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마도 인간이 AI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려고 경쟁하는 것은 답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AI는 수천 개의 길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길을 선택할지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AI는 여행 계획을 짜줄 수 있다.
하지만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AI는 수많은 직업을 추천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AI가 결정할 수 없다.
AI는 내가 쓸 글을 만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왜 그 글을 쓰려고 하는지까지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이것이 이타카의 의미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뭘까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방향을 잊지 않는 것
놀란식으로 생각하면 이 부분이 더 중요해진다.
놀란의 영화에는 복잡한 구조가 많다.
시간이 뒤섞인다.
정보가 제한된다.
관객은 계속 퍼즐을 맞춰야 한다.
하지만 오디세이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의외로 단순한 목표가 있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 목표 하나가 수많은 복잡한 사건을 관통한다.
이것을 AI 시대에 가져오면 아주 간단한 문장이 된다.
AI가 아무리 복잡해져도 인간의 방향까지 복잡해질 필요는 없다.
AI는 수많은 선택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모든 선택지를 따라갈 필요가 없다.
내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면 된다.
인공지능을 사용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된다.
놀란 역시 AI를 무조건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skepticism라는 표현이었다.
기술이 줄 수 있는 선물을 인정하면서도 무조건적인 믿음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차이다.
AI를 거부하는 것과 AI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망치를 사용한다고 해서 내가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자동차를 탄다고 해서 걷는 능력을 버릴 필요도 없다.
계산기를 사용한다고 해서 인간이 생각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도구가 나를 도와주는 것과 도구가 나를 대신하는 것 사이의 경계다.
AI는 훌륭한 조수일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놀란의 영화 제작 방식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처럼 보이는 이유
이 해석이 더욱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놀란은 오디세이를 만들면서 가능한 한 실제 세계를 이용했다.
배우들이 실제로 배를 타고 노를 저었고, 실제 장소에서 촬영했으며, 거대한 트로이 목마도 실제로 제작했다.
NPR 인터뷰에서 놀란은 배우들이 실제로 항해와 노 젓기를 배웠고, 실제 배와 바다에서 촬영하면서 스튜디오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놀란의 첫 전편 IMAX 필름 촬영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최첨단 기술을 무조건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기술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놀란은 자신을 기술 혐오자라기보다 techno-skeptic에 가깝게 설명했다.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지만 기존에 유효한 시스템을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버리는 것에는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AI에 대한 그의 태도와 정확히 연결된다.
새로운 기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숭배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중요하다.
정리
- 트로이 목마 : 편리한 기술 속에 함께 들어오는 보이지 않는 목적과 위험이다.
- 로터스 이터스 : 너무 편리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기억하고 목적을 추구하는 능력을 잃는 상태다.
- 사이클롭스 :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시스템과 힘 앞에서 판단력을 잃는 상황이다.
- 세이렌 :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려주는 매력적인 정보와 알고리즘의 유혹이다.
- 키르케 : 어느 순간 도구의 방식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현상이다.
- 칼립소 : 너무 편안해서 자신의 목적을 잊어버리는 상태다.
-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 기술을 써도 위험하고 사용하지 않아도 위험한, 현대 사회 딜레마 자체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이타카는 인간이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자신의 목적과 관계, 삶의 방향이다. 오디세이는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너무 멀리 떠나지 않기 위해, 다시 자신의 방향을 찾는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에 이 오래된 이야기가 다시 찾아온 것은, 어쩌면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역사를 통해 배우고 신화를 통해 상상한다.